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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오래된 얼굴 2025년, 가을 초입 (박철, 이주열, 김소연)
늦은 저녁이었다.
바는 한산했다. 재즈가 낮게 흘렀고, 손님 두어 명이 각자의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열은 카운터 뒤에서 글라스를 닦았고, 소연은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밤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가을 초입의 공기였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더 이상 여름도 아닌 온도.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랜 세월이 얼굴 위에 쌓여 있었지만, 걷는 방식만큼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김태식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야, 박철. 진짜 오랜만이네."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어색함과 묵직한 낯섦이 섞여 있었다. 오래 연락 없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올 때 짓는 특유의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형."
주열이 잔을 닦다가 슬쩍 시선을 올렸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런데 박철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묘하게 굳어 있었다. 주열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잔을 닦았다.
김태식은 자리에 앉아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옛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술 한 모금을 입에 넣고 삼키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요즘 진짜 힘들다. 너는 그래도 자리 잡았잖아. 조금만 도와줄 수 없을까?"
주열의 손이 순간 멈췄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에 쥔 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우리 옛날에 친했잖아. 너도 나한테 신세 많이 졌고."
"그걸 신세로 이야기하면 곤란하죠."
대화가 길어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주열과 소연은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둘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소연은 테이블을 닦는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시선이 자꾸 박철 쪽으로 갔다.
30분쯤 흘렀을까. 김태식이 화장실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비웠다.
주열이 잔을 닦는 척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저 사람 누구예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짧게 답했다.
"예전에 알던 형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열의 표정이 조용히 굳었다. 소연도 잔을 내려놓으며 박철을 봤다. 박철이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소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식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그래도, 박철아. 우리가 옛날에 얼마나 친했냐. 나는 진짜 어렵…"
그때 소연이 먼저 움직였다.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또렷했다.
"손님, 사장님이 직접 말씀 못 하시는 거 저도 알아요. 근데 오늘은 그냥 가주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김태식이 소연을 흘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야, 너 뭐야. 어디서 끼어들어."
그러고는 소연을 무시하고 다시 박철에게 몸을 돌렸다.
박철은 잠깐 소연을 바라봤다. 자신이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래도… 박철아, 우리가 옛날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그러나 힘을 실어서.
쨍그랑.
짧은 침묵이 흘렀다. 테이블 아래로 핏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그 순간은 아픈 것도 몰랐다.
주열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 핏방울에 닿았다. 순간 손이 먼저 움직이려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여기서 사고 치면 박철 형한테 짐이 된다. 이를 악물고 카운터를 돌아나왔다. 김태식의 팔을 잡았다. 말은 없었다. 그냥 일으켜 세웠다.
"나가시죠."
김태식이 주열을 올려다봤다. 넓은 어깨, 두꺼운 손목. 팔을 잡은 손의 힘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바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김태식은 헛웃음을 치며 일어섰다.
"하. 네가 뭔데, 가족이라도 되냐?"
"전 직원이기 전에 저 형의 동생입니다. 그러니 나가주시죠."
김태식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주열이 나가기 전 소연을 한 번 봤다.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열이 김태식을 데리고 바 밖으로 나섰다. 골목 입구에서 팔을 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며 낮게 말했다.
"다시 여기 얼씬하면, 그땐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웃지 않았다. 협박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김태식의 얼굴이 굳었다.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벽이 막았다.
그때 김태식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 전화, 꼭 해야겠어?"
김태식이 돌아봤다. 주열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없이.
골목 어귀에서 소연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주열이 주먹을 쥐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나 싶어 한 발짝 더 다가서려다 멈췄다. 주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씨X, 알았어. 안 오면 되잖아."
김태식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주열은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소연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주열이 돌아서며 말했다.
"들어가요."
바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깨진 잔을 치우고 있었다. 소연이 아무 말 없이 구급상자를 가져와 박철 손 앞에 내려놓았다. 박철은 잠깐 소연을 봤다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주열이 말했다.
"다신 안 올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소연이 새 잔에 조용히 술을 따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갓파더(Godfather). 스카치 위스키와 아마레토. 강하지만 달콤한 뒷맛이 있는 칵테일. 오래된 것들과 마주한 밤, 그 무게를 조용히 내려놓을 때 어울리는 술이다.
"드세요, 오빠."
나는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바 안에 재즈가 다시 낮게 흘렀다.
6화 — 각자의 밤 2025년, 같은 주 (이주열, 김소연 / 박철, 김가연)
박철이 두 사람에게 영화 티켓을 건넨 건 며칠 뒤였다.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냥 티켓 두 장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둘이 다녀와."
주열이 티켓을 집어들고 소연을 봤다. 소연은 잠깐 멈췄다가 받았다.
"감사합니다."
박철은 이미 돌아서서 잔을 닦고 있었다.
주열이 티켓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오늘 거네요."
"응."
"…같이 가도 되는 거죠?"
박철이 잔을 닦으며 대답했다.
"내가 두 장 준 거 못 봤어?"
주열이 소연을 봤다. 소연은 피식 웃으며 앞치마를 벗었다.
바를 나서며 주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이 왜 우리 둘을 보내는 거지."
소연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
"모르는 척해요."
영화관 입구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봤다.
유니폼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차림이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연이 먼저 말했다.
"주열 씨, 오늘 옷이 잘 어울리네요."
주열이 머리를 긁적였다.
"고마워요. 소연 씨도 오늘 달라 보여서 처음엔 몰라볼 뻔했어요."
소연이 피식 웃었다.
"매일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이상하네요."
"바에서는 항상 앞치마 차림이잖아요."
소연은 그 말에 잠깐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열이 뒤따랐다.
자리에 앉자 다시 어색함이 왔다. 팝콘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둘 다 화면만 봤다.
소연이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작게 물었다.
"사장님이 왜 하필 우리 둘을 보내신 걸까요?"
주열이 잠깐 그녀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어쩌면 두 사람 떼어놓으려고 작정한 걸지도 모르죠."
소연이 피식 웃었다.
불이 꺼졌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화면 속 인물이 오래된 골목을 걷는 장면이었다. 주열이 작게 말했다.
"저 골목, 한켠 근처 같은데."
소연이 화면을 보다가 말했다.
"진짜네요."
그게 다였다. 짧은 말이었지만 어색함이 조금 녹았다.
영화가 끝날 무렵, 소연이 눈가를 손등으로 살짝 닦았다. 주열은 못 본 척했다. 소연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불이 켜졌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동시에 서로를 봤다.
"울었어요?"
소연이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안 울었어요."
주열이 웃었다. 소연도 웃었다.
영화가 끝나고 두 사람은 근처 레스토랑에 앉았다.
와인 한 잔씩. 창밖으로 밤거리가 지나갔다. 평소 바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사이였지만, 막상 둘만의 공간이 되자 조금 달랐다.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종류의 침묵이었다.
소연이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솔직히, 주열 씨는 사장님을 왜 그렇게 따라요?"
주열은 잠시 창밖을 봤다가 말했다.
"처음엔 저도 몰랐어요. 어느 순간부터 형 눈에 서린 게 보였거든요. 외로움 같은 거. 어쩌면 저랑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제가 가지지 못한 면이 있어서 더 존경스러웠던 것도 있고요."
소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저도 비슷해요. 말을 많이 안 하는데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열이 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소연 씨는요? 바에서 일하기 전에 뭐 했어요?"
소연은 잠깐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이것저것요. 딱히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들."
주열은 더 묻지 않았다. 소연이 그 침묵을 고마워하는 게 느껴졌다.
소연이 잔을 들며 말했다.
"주열 씨는 복싱 언제부터 했어요?"
"열다섯."
"왜요?"
주열이 잠깐 웃었다.
"그때는 딱히 이유 같은 게 없었어요. 그냥 맞으면 안 되니까."
소연이 그 말을 곱씹듯 잠시 잔을 바라봤다.
"지금은요?"
"지금은… 그냥 제 방식인 것 같아요. 몸으로 먼저 느끼는 거."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 이상하게 잘 이해됐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창밖으로 밤바람에 낙엽이 하나 지나갔다.
소연이 먼저 말했다.
"오늘 좋았어요."
주열이 잠깐 그녀를 봤다.
"저도요."
더 말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늦은 밤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말이 없었다. 영화 얘기도, 바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아스팔트 위에 길게 늘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소연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주열이 속도를 살짝 늦췄다. 소연도 모르게.
골목 어귀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소연이 그쪽을 봤다. 주열도 봤다.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 블록쯤 더 걸었을 때 소연이 말했다.
"저 여기서 가면 돼요."
주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들어가요."
소연은 돌아서다가 잠깐 멈췄다. 뭔가를 말하려다 그냥 두었다. 주열도 묻지 않았다.
소연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주열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빈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간, 바에는 박철과 가연만 남아 있었다.
손님이 다 빠진 뒤였다. 가연은 구석 자리에서 노트를 펼쳐놓고 뭔가를 적다가, 펜을 내려놓고 박철을 바라봤다.
"사장님."
박철은 잔을 닦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심심하지 않아요?"
"안 심심해."
가연은 턱을 괴고 한참 박철을 바라봤다.
"거짓말."
박철은 잔을 내려놓고 가연을 봤다. 할 말이 없었다.
가연이 노트를 덮고 카운터 앞 의자로 옮겨 앉았다.
"사장님은 언니 처음 봤을 때 어땠어요?"
박철이 잔을 닦으며 말했다.
"비 맞고 들어온 사람."
"그게 다예요?"
"그게 다야."
가연이 입술을 삐죽였다.
"거짓말 두 번째."
박철은 대꾸하지 않았다. 가연은 잠시 박철을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주열 오빠는요?"
"잘 하겠다 싶었지."
"처음부터요?"
"처음부터."
가연이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사장님은 사람 보는 눈이 있나봐요."
박철이 잔을 닦으며 말했다.
"틀린 적도 있어."
가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구요?"
박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연은 그게 더 재미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박철이 냉장고를 열었다. 가연이 좋아하는 음료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가연은 음료를 집어들며 웃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박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잔을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가연은 그걸 못 본 척했다. 노트를 펼치고 한 줄을 적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덮었다.
박철은 마감을 마치고 혼자 카운터에 앉았다.
잔 하나를 꺼냈다. 천천히 따랐다.
올드 패션드(Old Fashioned). 버번 위스키, 설탕, 비터스. 꾸미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마시는 술. 오늘 같은 밤, 혼자 마시는 술.
한 모금 마셨다.
"괜히 오지랖 부렸나."
아무도 없는 바 안에서 혼잣말이 낮게 퍼졌다. 잠시 잔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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