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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오래된 얼굴 2025년, 가을 초입 (박철, 이주열, 김소연)

늦은 저녁이었다.

바는 한산했다. 재즈가 낮게 흘렀고, 손님 두어 명이 각자의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열은 카운터 뒤에서 글라스를 닦았고, 소연은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밤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가을 초입의 공기였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더 이상 여름도 아닌 온도.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랜 세월이 얼굴 위에 쌓여 있었지만, 걷는 방식만큼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김태식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야, 박철. 진짜 오랜만이네."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어색함과 묵직한 낯섦이 섞여 있었다. 오래 연락 없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올 때 짓는 특유의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형."

주열이 잔을 닦다가 슬쩍 시선을 올렸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런데 박철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묘하게 굳어 있었다. 주열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잔을 닦았다.

김태식은 자리에 앉아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옛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술 한 모금을 입에 넣고 삼키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요즘 진짜 힘들다. 너는 그래도 자리 잡았잖아. 조금만 도와줄 수 없을까?"

주열의 손이 순간 멈췄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에 쥔 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우리 옛날에 친했잖아. 너도 나한테 신세 많이 졌고."

"그걸 신세로 이야기하면 곤란하죠."

대화가 길어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주열과 소연은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둘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소연은 테이블을 닦는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시선이 자꾸 박철 쪽으로 갔다.

30분쯤 흘렀을까. 김태식이 화장실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비웠다.

주열이 잔을 닦는 척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저 사람 누구예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짧게 답했다.

"예전에 알던 형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열의 표정이 조용히 굳었다. 소연도 잔을 내려놓으며 박철을 봤다. 박철이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소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식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그래도, 박철아. 우리가 옛날에 얼마나 친했냐. 나는 진짜 어렵…"

그때 소연이 먼저 움직였다.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또렷했다.

"손님, 사장님이 직접 말씀 못 하시는 거 저도 알아요. 근데 오늘은 그냥 가주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김태식이 소연을 흘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야, 너 뭐야. 어디서 끼어들어."

그러고는 소연을 무시하고 다시 박철에게 몸을 돌렸다.

박철은 잠깐 소연을 바라봤다. 자신이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래도… 박철아, 우리가 옛날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그러나 힘을 실어서.

쨍그랑.

짧은 침묵이 흘렀다. 테이블 아래로 핏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그 순간은 아픈 것도 몰랐다.

주열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 핏방울에 닿았다. 순간 손이 먼저 움직이려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여기서 사고 치면 박철 형한테 짐이 된다. 이를 악물고 카운터를 돌아나왔다. 김태식의 팔을 잡았다. 말은 없었다. 그냥 일으켜 세웠다.

"나가시죠."

김태식이 주열을 올려다봤다. 넓은 어깨, 두꺼운 손목. 팔을 잡은 손의 힘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바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김태식은 헛웃음을 치며 일어섰다.

"하. 네가 뭔데, 가족이라도 되냐?"

"전 직원이기 전에 저 형의 동생입니다. 그러니 나가주시죠."

김태식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주열이 나가기 전 소연을 한 번 봤다.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열이 김태식을 데리고 바 밖으로 나섰다. 골목 입구에서 팔을 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며 낮게 말했다.

"다시 여기 얼씬하면, 그땐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웃지 않았다. 협박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김태식의 얼굴이 굳었다.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벽이 막았다.

그때 김태식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 전화, 꼭 해야겠어?"

김태식이 돌아봤다. 주열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없이.

골목 어귀에서 소연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주열이 주먹을 쥐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나 싶어 한 발짝 더 다가서려다 멈췄다. 주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씨X, 알았어. 안 오면 되잖아."

김태식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주열은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소연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주열이 돌아서며 말했다.

"들어가요."

바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깨진 잔을 치우고 있었다. 소연이 아무 말 없이 구급상자를 가져와 박철 손 앞에 내려놓았다. 박철은 잠깐 소연을 봤다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주열이 말했다.

"다신 안 올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소연이 새 잔에 조용히 술을 따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갓파더(Godfather). 스카치 위스키와 아마레토. 강하지만 달콤한 뒷맛이 있는 칵테일. 오래된 것들과 마주한 밤, 그 무게를 조용히 내려놓을 때 어울리는 술이다.

"드세요, 오빠."

나는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바 안에 재즈가 다시 낮게 흘렀다.


6화 — 각자의 밤 2025년, 같은 주 (이주열, 김소연 / 박철, 김가연)

박철이 두 사람에게 영화 티켓을 건넨 건 며칠 뒤였다.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냥 티켓 두 장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둘이 다녀와."

주열이 티켓을 집어들고 소연을 봤다. 소연은 잠깐 멈췄다가 받았다.

"감사합니다."

박철은 이미 돌아서서 잔을 닦고 있었다.

주열이 티켓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오늘 거네요."

"응."

"…같이 가도 되는 거죠?"

박철이 잔을 닦으며 대답했다.

"내가 두 장 준 거 못 봤어?"

주열이 소연을 봤다. 소연은 피식 웃으며 앞치마를 벗었다.

바를 나서며 주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이 왜 우리 둘을 보내는 거지."

소연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

"모르는 척해요."

영화관 입구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봤다.

유니폼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차림이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연이 먼저 말했다.

"주열 씨, 오늘 옷이 잘 어울리네요."

주열이 머리를 긁적였다.

"고마워요. 소연 씨도 오늘 달라 보여서 처음엔 몰라볼 뻔했어요."

소연이 피식 웃었다.

"매일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이상하네요."

"바에서는 항상 앞치마 차림이잖아요."

소연은 그 말에 잠깐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열이 뒤따랐다.

자리에 앉자 다시 어색함이 왔다. 팝콘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둘 다 화면만 봤다.

소연이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작게 물었다.

"사장님이 왜 하필 우리 둘을 보내신 걸까요?"

주열이 잠깐 그녀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어쩌면 두 사람 떼어놓으려고 작정한 걸지도 모르죠."

소연이 피식 웃었다.

불이 꺼졌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화면 속 인물이 오래된 골목을 걷는 장면이었다. 주열이 작게 말했다.

"저 골목, 한켠 근처 같은데."

소연이 화면을 보다가 말했다.

"진짜네요."

그게 다였다. 짧은 말이었지만 어색함이 조금 녹았다.

영화가 끝날 무렵, 소연이 눈가를 손등으로 살짝 닦았다. 주열은 못 본 척했다. 소연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불이 켜졌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동시에 서로를 봤다.

"울었어요?"

소연이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안 울었어요."

주열이 웃었다. 소연도 웃었다.

영화가 끝나고 두 사람은 근처 레스토랑에 앉았다.

와인 한 잔씩. 창밖으로 밤거리가 지나갔다. 평소 바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사이였지만, 막상 둘만의 공간이 되자 조금 달랐다.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종류의 침묵이었다.

소연이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솔직히, 주열 씨는 사장님을 왜 그렇게 따라요?"

주열은 잠시 창밖을 봤다가 말했다.

"처음엔 저도 몰랐어요. 어느 순간부터 형 눈에 서린 게 보였거든요. 외로움 같은 거. 어쩌면 저랑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제가 가지지 못한 면이 있어서 더 존경스러웠던 것도 있고요."

소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저도 비슷해요. 말을 많이 안 하는데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열이 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소연 씨는요? 바에서 일하기 전에 뭐 했어요?"

소연은 잠깐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이것저것요. 딱히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들."

주열은 더 묻지 않았다. 소연이 그 침묵을 고마워하는 게 느껴졌다.

소연이 잔을 들며 말했다.

"주열 씨는 복싱 언제부터 했어요?"

"열다섯."

"왜요?"

주열이 잠깐 웃었다.

"그때는 딱히 이유 같은 게 없었어요. 그냥 맞으면 안 되니까."

소연이 그 말을 곱씹듯 잠시 잔을 바라봤다.

"지금은요?"

"지금은… 그냥 제 방식인 것 같아요. 몸으로 먼저 느끼는 거."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 이상하게 잘 이해됐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창밖으로 밤바람에 낙엽이 하나 지나갔다.

소연이 먼저 말했다.

"오늘 좋았어요."

주열이 잠깐 그녀를 봤다.

"저도요."

더 말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늦은 밤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말이 없었다. 영화 얘기도, 바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아스팔트 위에 길게 늘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소연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주열이 속도를 살짝 늦췄다. 소연도 모르게.

골목 어귀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소연이 그쪽을 봤다. 주열도 봤다.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 블록쯤 더 걸었을 때 소연이 말했다.

"저 여기서 가면 돼요."

주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들어가요."

소연은 돌아서다가 잠깐 멈췄다. 뭔가를 말하려다 그냥 두었다. 주열도 묻지 않았다.

소연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주열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빈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간, 바에는 박철과 가연만 남아 있었다.

손님이 다 빠진 뒤였다. 가연은 구석 자리에서 노트를 펼쳐놓고 뭔가를 적다가, 펜을 내려놓고 박철을 바라봤다.

"사장님."

박철은 잔을 닦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심심하지 않아요?"

"안 심심해."

가연은 턱을 괴고 한참 박철을 바라봤다.

"거짓말."

박철은 잔을 내려놓고 가연을 봤다. 할 말이 없었다.

가연이 노트를 덮고 카운터 앞 의자로 옮겨 앉았다.

"사장님은 언니 처음 봤을 때 어땠어요?"

박철이 잔을 닦으며 말했다.

"비 맞고 들어온 사람."

"그게 다예요?"

"그게 다야."

가연이 입술을 삐죽였다.

"거짓말 두 번째."

박철은 대꾸하지 않았다. 가연은 잠시 박철을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주열 오빠는요?"

"잘 하겠다 싶었지."

"처음부터요?"

"처음부터."

가연이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사장님은 사람 보는 눈이 있나봐요."

박철이 잔을 닦으며 말했다.

"틀린 적도 있어."

가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구요?"

박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연은 그게 더 재미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박철이 냉장고를 열었다. 가연이 좋아하는 음료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가연은 음료를 집어들며 웃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박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잔을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가연은 그걸 못 본 척했다. 노트를 펼치고 한 줄을 적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덮었다.

박철은 마감을 마치고 혼자 카운터에 앉았다.

잔 하나를 꺼냈다. 천천히 따랐다.

올드 패션드(Old Fashioned). 버번 위스키, 설탕, 비터스. 꾸미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마시는 술. 오늘 같은 밤, 혼자 마시는 술.

한 모금 마셨다.

"괜히 오지랖 부렸나."

아무도 없는 바 안에서 혼잣말이 낮게 퍼졌다. 잠시 잔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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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오래된 얼굴 2025년, 가을 초입 (박철, 이주열, 김소연)

늦은 저녁이었다.

바는 한산했다. 재즈가 낮게 흘렀고, 손님 두어 명이 각자의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열은 카운터 뒤에서 글라스를 닦았고, 소연은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밤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가을 초입의 공기였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더 이상 여름도 아닌 온도.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랜 세월이 얼굴 위에 쌓여 있었지만, 걷는 방식만큼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김태식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야, 박철. 진짜 오랜만이네."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어색함과 묵직한 낯섦이 섞여 있었다. 오래 연락 없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올 때 짓는 특유의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형."

주열이 잔을 닦다가 슬쩍 시선을 올렸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런데 박철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묘하게 굳어 있었다. 주열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잔을 닦았다.

김태식은 자리에 앉아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옛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술 한 모금을 입에 넣고 삼키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요즘 진짜 힘들다. 너는 그래도 자리 잡았잖아. 조금만 도와줄 수 없을까?"

주열의 손이 순간 멈췄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에 쥔 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우리 옛날에 친했잖아. 너도 나한테 신세 많이 졌고."

"그걸 신세로 이야기하면 곤란하죠."

대화가 길어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주열과 소연은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둘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소연은 테이블을 닦는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시선이 자꾸 박철 쪽으로 갔다.

30분쯤 흘렀을까. 김태식이 화장실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비웠다.

주열이 잔을 닦는 척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저 사람 누구예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짧게 답했다.

"예전에 알던 형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열의 표정이 조용히 굳었다. 소연도 잔을 내려놓으며 박철을 봤다. 박철이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소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식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그래도, 박철아. 우리가 옛날에 얼마나 친했냐. 나는 진짜 어렵…"

그때 소연이 먼저 움직였다.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또렷했다.

"손님, 사장님이 직접 말씀 못 하시는 거 저도 알아요. 근데 오늘은 그냥 가주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김태식이 소연을 흘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야, 너 뭐야. 어디서 끼어들어."

그러고는 소연을 무시하고 다시 박철에게 몸을 돌렸다.

박철은 잠깐 소연을 바라봤다. 자신이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래도… 박철아, 우리가 옛날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그러나 힘을 실어서.

쨍그랑.

짧은 침묵이 흘렀다. 테이블 아래로 핏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그 순간은 아픈 것도 몰랐다.

주열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 핏방울에 닿았다. 순간 손이 먼저 움직이려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여기서 사고 치면 박철 형한테 짐이 된다. 이를 악물고 카운터를 돌아나왔다. 김태식의 팔을 잡았다. 말은 없었다. 그냥 일으켜 세웠다.

"나가시죠."

김태식이 주열을 올려다봤다. 넓은 어깨, 두꺼운 손목. 팔을 잡은 손의 힘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바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김태식은 헛웃음을 치며 일어섰다.

"하. 네가 뭔데, 가족이라도 되냐?"

"전 직원이기 전에 저 형의 동생입니다. 그러니 나가주시죠."

김태식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주열이 나가기 전 소연을 한 번 봤다.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열이 김태식을 데리고 바 밖으로 나섰다. 골목 입구에서 팔을 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며 낮게 말했다.

"다시 여기 얼씬하면, 그땐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웃지 않았다. 협박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김태식의 얼굴이 굳었다.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벽이 막았다.

그때 김태식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 전화, 꼭 해야겠어?"

김태식이 돌아봤다. 주열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없이.

골목 어귀에서 소연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주열이 주먹을 쥐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나 싶어 한 발짝 더 다가서려다 멈췄다. 주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씨X, 알았어. 안 오면 되잖아."

김태식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주열은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소연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주열이 돌아서며 말했다.

"들어가요."

바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깨진 잔을 치우고 있었다. 소연이 아무 말 없이 구급상자를 가져와 박철 손 앞에 내려놓았다. 박철은 잠깐 소연을 봤다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주열이 말했다.

"다신 안 올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소연이 새 잔에 조용히 술을 따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갓파더(Godfather). 스카치 위스키와 아마레토. 강하지만 달콤한 뒷맛이 있는 칵테일. 오래된 것들과 마주한 밤, 그 무게를 조용히 내려놓을 때 어울리는 술이다.

"드세요, 오빠."

나는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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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새로운 인연

2024년 9월 1일, 같은 밤

재즈가 흘렀다.

낮고 느린 트럼펫 소리였다. 바 안을 한 바퀴 채우고, 천장 어딘가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음악. 조명은 따뜻한 쪽이었고, 손님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카운터에 혼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는 중년 남자, 구석 테이블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커플. 비 오는 일요일 밤은 대개 그랬다. 세상이 조금 느려지는 밤이었다.

나는 잔을 닦고 있었다. 생각 없이, 손만 움직이는 일. 하루를 정리할 때 늘 하는 방식이었다. 글라스 하나를 들어 빛에 비춰보고, 흠이 없으면 제자리에 놓는다. 그 반복이 나쁘지 않았다.

주열이 글라스를 정리하다 말했다.

"형, 비 오는 날은 괜히 마음이 차분해져요."

나는 잠깐 손을 멈추고 창밖을 봤다. 빗줄기가 간판 불빛에 부서지고 있었다. 저 아래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게. 이런 날은 다들 집에 있지."

주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글라스를 닦았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그게 편했다.


문이 열렸다. 생각보다 세게.

젊은 여자 하나, 어린 여자아이 하나. 여자는 어깨가 들썩일 만큼 숨이 찼고, 아이는 말없이 언니 옷자락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두 사람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여자의 뺨에는 빗물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모를 것이 번져 있었다.

"죄송한데요."

여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말은 또렷했다.

"저희가 누군가한테 쫓기고 있어요. 잠깐만 여기 있어도 될까요?"

나는 두 사람을 봤다. 젖은 머리, 떨리는 손끝, 문 쪽을 자꾸 흘끗거리는 눈. 오래 긴장한 사람들의 몸이 보내는 신호들이었다. 별로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여긴 안전합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 말에 여자는 가연의 손에 들어가 있던 힘을 조금 풀었다. 주열은 아무 말 없이 앞치마를 벗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아이가 순간 움찔했다. 나는 그냥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따뜻한 차를 내왔다. 오늘 밤 같은 날에는 이게 맞았다.

"이거부터 드세요. 비 맞으면 몸이 먼저 식어요."

여자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만큼 쥐었다가, 잔의 온기가 전해지는지 천천히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아이도 컵을 두 손으로 잡았다.

"따뜻해요."

아이가 작게 말했다.

잠시 후 주열이 돌아왔다. 어깨에 빗물이 조금 묻어 있었다.

"형, 다 갔어요."

"고생했다."

여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주열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여긴 원래 이런 곳이에요."


이름을 나눴다.

"박철입니다."

"저는 김소연이에요. 이쪽은 동생, 가연이고요."

가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언니 옆으로 몸을 조금 붙였다. 아직 경계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몸짓이었다.

"안녕하세요."

주열이 웃었다.

"이주열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그냥 앉아서 조금씩 얘기했다.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소연은 부모를 일찍 잃었고, 동생이랑 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말하는 내내 시선이 가연 쪽을 향했다. 설명이 아니라 확인하듯이, 동생이 잘 있는지 살피듯이.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잔만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네요."

소연이 가연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같이 있어서 버텼어요."

가연이 작게 말했다.

"언니는 맨날 저만 생각해요."

소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 머리를 손으로 살짝 쓸었다. 가연은 그 손길에 눈을 내리깔았다.


주열이 가연 앞에 잔 하나를 내려놨다.

셜리 템플(Shirley Temple). 술이 없다. 그래도 어엿한 한 잔처럼 보인다. 1930년대 미국 아역 배우의 이름에서 따왔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이름. 그 마음으로 만드는 음료다.

"이건 너한테 꼭 어울릴 것 같아서."

가연은 눈을 반짝이며 한 모금 마셨다.

"이름도 예쁘고 맛도 달콤해요!"

나는 소연 앞에 잔을 밀어놨다.

오늘 밤 소연에게 맞는 건 올드 패션드(Old Fashioned) 였다. 버번 위스키, 설탕, 비터스. 오렌지 필 한 조각. 꾸미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마시는 술. 가장 오래된 칵테일 중 하나다. 복잡하지 않고, 그래서 오래 간다.

"편하게 드세요."

소연은 한 모금 마시고 잠깐 눈을 감았다. 그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혹시 노래 좋아하세요?"

주열이 물었다.

"네, 듣는 거요."

"좋아하는 거 틀어드릴게요."

재즈가 다시 바 안을 채웠다. 소연은 눈을 감았다. 밖의 어둠이 조금 멀어지는 것 같았다. 빗소리가 음악 사이로 낮게 깔렸다.

가연이 주열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 꿈이 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언니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주열이 말했다.

"너는 이미 충분히 강한데."

가연은 그 말이 좋았다. 괜히 웃음이 났다.


한참 뒤, 가연이 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오늘은 좋은 일보다 힘든 일이 더 많았죠?"

소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가연은 그 손길에 눈을 살짝 감았다.

바 안에 빗소리만 낮게 깔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세요. 비도 많이 오고, 밖은 위험할 테니까요."

소연이 망설이다 말했다.

"정말 괜찮으시다면."

"인연이니까요."

그날 밤 작은 방에서 둘은 나란히 누웠다. 가연은 금방 잠들었다.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소연은 한참 눈을 뜨고 있었다. 천장을 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오늘은 정말 고마운 날이었어."


다음 날 아침, 소연은 고개를 숙였다.

"다시 올게요."

가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꼭이요!"

주열은 손을 흔들었다.

"언제든요."

소연은 나가면서 간판을 한 번 더 바라봤다. 한켠. 이름을 마음속에 조용히 남겼다.


그 이후 두 사람은 가끔 바에 들렀다. 소연은 가끔 일을 도왔고, 가연은 구석에서 뭔가를 끄적였다. 한켠은 여전히 같았다. 사람만 조금 늘어났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2화 — 자리

2025년, 봄이 막 시작되던 무렵

봄이 온다는 건 냄새로 먼저 안다.

흙과 습기가 섞인 냄새, 아직 차갑지만 더 이상 겨울이 아닌 공기. 한켠의 문을 열면 그 냄새가 살짝 밀려들어왔다가 금세 바 안의 냄새에 섞였다. 나무와 가죽, 오래된 위스키 향. 익숙한 냄새들이었다.

주열은 글라스를 닦으며 작게 흥얼거렸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흥얼거리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형, 오늘 손님 좀 있네요."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봄이 오면 사람들이 조금 더 움직인다. 겨울 동안 집에만 있다가 바깥 공기가 그리워지는 시기. 그런 사람들이 골목 끝까지 걸어 들어오곤 했다.


문이 열렸다. 소연이랑 가연이었다.

비 오는 밤 처음 본 뒤로 자주 왔다. 얼굴이 익숙해질 만큼. 가연은 들어올 때마다 인사가 한 데시벨씩 커지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박철 아저씨. 주열 오빠!"

나는 순간 멈칫했다. 아직 그 말이 익숙하지 않았다. 마흔둘에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괜히 잔을 닦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 가연아."

주열이 그걸 보고 웃었다.

"형, 이제 아저씨 소리도 듣네."

나는 대답 대신 잔을 옮겼다.


가연은 신이 나 있었다.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돼 있었다.

"저 오늘 학교 글쓰기 대회에서 상 받았어요."

주열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가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진짜? 잘했네."

나는 소연을 봤다. 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굳어 있었다. 가연이 들어올 때와 달리 소연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무슨 일로 왔어요?"

소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다 말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집을 정리하려고요. 더는 거기서 사는 게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생각했다. 안전하지 않다는 말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같이 가보죠."

주열은 이미 앞치마를 벗고 있었다.

"제가 알아볼게요."


집 안은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뒤집힌 서랍, 흩어진 물건들. 누군가 손댄 흔적이 역력했다. 오래된 액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소연은 그걸 보고 잠깐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그때 거친 사내 둘이 물건을 끌고 나가려다 멈췄다.

주열이 앞으로 나섰다. 말은 없었다.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에 남은 오래된 흉터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기 내 동생 집인데."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화가 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미 결정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너희 누구냐."

한 놈이 코웃음을 쳤다.

"뭔데. 허세 부리지 마."

그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주열의 오른 주먹이 호를 그리며 나갔다. 턱에 맞은 놈이 그대로 쓰러졌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남은 놈이 뒷걸음질을 쳤다. 눈빛이 흔들렸다.

주열이 말했다.

"계속할 거면 해. 대신 여기서 못 나간다."

"야, 그만하자."

놈은 쓰러진 동료를 끌고 나갔다. 주열은 한동안 문 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소매를 내렸다.

"다신 안 올 겁니다."

소연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오래 참고 있던 숨이었다. 가연은 언니 손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짐은 생각보다 많았다. 두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였다.

주열이 전화를 돌렸다.

"후배들 부를게요."

잠시 뒤 체육관 애들이 왔다. 어깨가 넓고 손이 컸지만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 그냥 묵묵히 옮겼다. 가연은 그 옆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웃었다.

"언니, 이제 진짜 시작인 것 같아."

소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며칠 뒤, 바 근처 작은 집을 구했다.

소연과 가연은 집을 둘러보다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작고, 좁고, 햇빛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 얼굴은 밝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에요. 가까우면 서로 편하죠."

가연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제 매일 올 수 있겠네요!"

주열이 웃었다.

"매일은 좀 그렇고."


소연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저, 여기서 일 배워도 될까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소연을 봤다. 망설이는 눈빛이었지만, 그 안에 이미 결심이 들어가 있었다.

"힘들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봅시다."

소연이 웃었다. 긴장이 풀리며 어깨가 살짝 내려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주열이 한마디 덧붙였다.

"형, 이제 오빠 소리도 듣겠네."

나는 또 헛기침을 했다.


그날 밤 바는 조금 시끄러웠다.

가연은 주열 옆에 찰싹 붙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주열은 귀찮은 기색 없이 하나하나 대답했다. 소연은 서툰 손으로 잔을 닦았다. 손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다.

나는 말없이 옆에서 시범을 보였다. 힘 빼고, 원을 그리듯.

소연이 한 번 따라 하다가 살짝 웃었다.

그날 처음으로 소연에게 네그로니(Negroni) 를 만들어줬다. 진, 캄파리, 스위트 베르무트. 각자 개성이 강한 세 가지가 만나 하나의 균형을 이루는 칵테일. 쓰고, 달고, 향긋하다. 처음엔 낯설다. 마실수록 자기 맛이 생긴다.

소연이 한 모금 마시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쓰다."

"처음엔 다 그래요."

소연은 잔을 내려보다가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창밖으로 봄바람이 불었다.



3화 — 자기 자리

2025년, 여름이 끝날 무렵

소연이 바에서 일한 지 반년쯤 됐다.

처음엔 잔 잡는 것도 서툴렀다. 손님 눈을 잘 못 마주쳤고, 손목엔 항상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뭔가를 잘못할까봐 수시로 나를 흘끗거리던 것도. 나는 모른 척했다. 그게 더 빨리 익숙해지는 방법이라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반년이 지난 지금은 달랐다. 소연을 보고 웃는 손님이 생겼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도 생겼다. 바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말도 종종 들려왔다. 나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지만, 알고는 있었다.


어느 저녁이었다. 손님이 빠지고 바가 잠잠해졌을 때, 나는 소연을 불렀다.

"소연 씨."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소연은 바로 받지 않았다. 손가락을 살짝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사장님, 저 급여 안 받아도 된다고—"

나는 말을 끊었다.

"일한 만큼 받는 거야."

소연은 잠깐 망설이다 봉투를 열었다. 눈이 조금 커졌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많죠?"

내가 먼저 말했다.

"그만큼 일했어요."

소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박철 오빠…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오빠.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괜히 어색해져서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돌아섰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이런 건 오래 마주보면 괜히 더 어색해진다.


주열은 그날 카운터에 잔 하나를 내놨다. 연한 초록빛이 도는 칵테일이었다.

애플 마티니(Apple Martini). 보드카에 사과 리큐어를 더한 칵테일. 달콤하고 산뜻하다. 수줍지만 한 발 내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맛이다.

"이건 소연 몫."

소연이 놀라서 물었다.

"저요?"

"그래. 요즘 바 분위기 좋아진 거, 다들 알아."

소연은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었다.

"맛있어요."

"그럼 됐지."

더 말 붙이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어느 밤이었다. 좀 취한 손님 하나가 선을 넘었다.

이름을 묻고, 가까이 다가오고, 말이 점점 길어졌다. 소연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목소리는 아직 조용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주열이 카운터를 닦다 말고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섰다.

"손님."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주변 단골들도 슬쩍 시선을 줬다. 몇몇은 자연스럽게 소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무도 말은 안 했지만 그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공기가 달라졌다.

손님은 눈치를 보다가 나갔다.

소연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단골 하나가 잔을 들며 말했다.

"소연 씨는 여기 사람이잖아요."

설명도, 위로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가연은 그날 구석에서 뭔가를 끄적이다가 아무렇지 않게 소연한테 말했다.

"언니, 오늘 무서웠죠?"

소연은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조금."

가연이 노트를 덮으며 일어났다. 언니 옆에 와서 그냥 앉았다. 아무 말 없이. 소연은 동생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 이후로 소연은 달라졌다. 말이 편해졌고, 웃는 것도 늘었다. 서툴었던 손동작도 어느 순간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자리를 찾은 사람처럼 보였다.

어느 날 소연이 나한테 말했다.

"오빠, 정말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야."

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한텐 컸어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헛기침만 했다.


그때 가연이 끼어들었다.

"주열 오빠, 새 칵테일 언제 만들어요?"

주열이 웃었다.

"지금은 아니고."

"에이—"

바 안에 웃음이 났다.

한켠은 여전히 술집이다. 조금 시끄럽고, 조금 따뜻한. 요즘은 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게 나쁘지 않다.



5화 — 오래된 얼굴

2025년, 가을 초입

(박철, 이주열, 김소연)


늦은 저녁이었다.

바는 한산했다. 재즈가 낮게 흘렀고, 손님 두어 명이 각자의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열은 카운터 뒤에서 글라스를 닦았고, 소연은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가을 초입의 공기였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더 이상 여름도 아닌 온도.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랜 세월이 얼굴 위에 쌓여 있었지만, 걷는 방식만큼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김태식이었다.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야, 박철. 진짜 오랜만이네."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어색함과 묵직한 낯섦이 섞여 있었다. 오래 연락 없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올 때 짓는 특유의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형."

주열이 잔을 닦다가 슬쩍 시선을 올렸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런데 박철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묘하게 굳어 있었다.

김태식은 자리에 앉아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옛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술 한 모금을 입에 넣고 삼키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요즘 진짜 힘들다. 너는 그래도 자리 잡았잖아. 조금만 도와줄 수 없을까?"

주열의 손이 순간 멈췄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에 쥔 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우리 옛날에 친했잖아. 너도 나한테 신세 많이 졌고."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걸 신세로 이야기하면 곤란하죠."


대화가 길어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주열과 소연은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둘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소연은 테이블을 닦는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박철 쪽으로 시선이 자꾸 갔다.

30분쯤 흘렀을까. 김태식이 화장실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비웠다.

주열이 잔을 닦는 척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저 사람 누구예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짧게 답했다.

"예전에 알던 형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열의 표정이 조용히 굳었다.


김태식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그래도, 박철아. 우리가 옛날에 얼마나 친했냐. 나는 진짜 어렵…"

그 순간이었다.

나는 쥐고 있던 잔을 놓쳤다.

쨍그랑.

잔이 깨지며 짧은 침묵이 흘렀다.

주열이 결심한 듯 카운터 앞으로 나섰다. 김태식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 여기 장사하는 곳입니다. 더 이상 불편하게 하지 마시고 나가주세요. 오늘 드신 건 안 받겠습니다."

김태식이 황당한 표정으로 주열을 봤다.

"야, 너 뭐야?"

주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장님이 이런 말 못 하는 사람이라서요. 대신하는 겁니다."

바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김태식은 헛웃음을 치며 일어섰다.

"하. 네가 뭔데, 가족이라도 되냐?"

"전 직원이기 전에 저 형의 동생입니다. 그러니 나가주시죠."

김태식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바를 나섰다.


그때였다. 주열이 나가기 전 소연을 한 번 봤다.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열이 조용히 따라 나갔다.


골목은 어두웠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김태식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려다 멈칫했다.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 전화, 꼭 해야겠어요?"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날카로웠다.

김태식이 돌아봤다. 주열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없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주열이 한 걸음 다가섰다.

"박철 형 이름 들먹이며 전화하려는 거,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김태식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주열의 눈빛에 그 웃음은 굳어버렸다.

"씨X, 알았어. 안 오면 되잖아."

주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태식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골목 어귀에서 소연이 숨을 죽이며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열이 돌아서며 말했다.

"들어가요."

소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깨진 잔을 치우고 있었다.

주열이 말했다.

"다신 안 올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소연이 새 잔에 뭔가를 따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갓파더(Godfather). 스카치 위스키와 아마레토. 강하지만 달콤한 뒷맛이 있는 칵테일. 오래된 것들과 화해하는 밤에 어울리는 술이다.

"드세요, 오빠."

나는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2025년, 봄 끝 무렵

소연이 바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됐다.

처음 일주일은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잔을 놓는 위치도, 손님에게 말 거는 타이밍도. 소연은 뭔가를 잘못할까봐 수시로 나를 흘끗거렸다. 나는 모른 척했다. 지켜보면서도 못 본 척하는 것, 그게 이 바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어느 정도 손에 익기 시작했다. 잔을 닦는 손목에서 힘이 빠졌고, 손님 눈을 마주치는 것도 조금 자연스러워졌다. 아직 멀었지만, 방향은 맞았다.


그날 오후, 바는 한산했다.

햇빛이 창문을 비스듬히 넘어와 카운터 위에 길게 누웠다. 주열이 새 레시피를 실험하고 있었다. 민트를 더 넣어보겠다며 혼자 진지하게 잔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복싱 선수 시절의 집중력과 묘하게 겹쳤다.

"형, 이거 어때요?"

나는 한 모금 마셨다.

"직접 마셔봐."

주열이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잠깐 생각하더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 괜찮은데요?"

그는 완성된 잔을 카운터에 내려놓고 재료를 정리하러 자리를 비웠다.


가연은 구석 자리에서 노트를 펼쳐놓고 있었다.

뭔가를 끄적이다가 막혔는지, 펜을 입술에 대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내렸다. 카운터 위의 잔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이 잔을 투과하면서 초록빛이 살짝 도는 색깔이었다.

가연은 노트를 덮고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별 생각 없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순간 쓴맛과 알코올 향이 확 퍼졌다.

"으악."

가연은 잔을 내려놓고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이불을 끌어안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큰일 났다… 술 마셔버렸다…"

취기가 살짝 돌았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참 후, 소연이 가연을 찾기 시작했다.

바 안을 두 바퀴 돌다가 닫힌 방문을 발견했다. 문을 열었다. 가연이 이불을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얼굴이 살짝 붉었다.

소연이 가까이 다가갔다. 알코올 냄새가 났다.

"가연아."

가연이 눈을 비비며 깼다.

"언니… 미안해요…"

소연의 표정이 굳었다.

"어린애가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해. 생각이 있어, 없어."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가 났지만 더 큰 건 걱정이었다.

그때 주열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소연 씨."

소연이 돌아봤다.

"제 잘못이에요. 칵테일 두고 자리 비운 제가 잘못한 거니까. 너무 혼내지 마세요."

소연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그래도 가연이한테는 단단히 얘기할게요."

주열은 가연 옆에 쪼그려 앉았다.

"가연아, 괜찮아. 근데 다음엔 물어보고 마시자. 알았지?"

가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주열 오빠."

"사과 말고."

주열이 일어서며 말했다.

"대신 내가 네 거 따로 만들어줄게."


잠시 후 주열이 잔 하나를 들고 왔다.

버진 피냐 콜라다(Virgin Piña Colada). 럼이 빠진 피냐 콜라다. 코코넛과 파인애플의 달콤함만 남은 음료. 술 없이도 충분히 특별한 맛이 난다. 잔 위에 파인애플 조각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자, 이건 네가 마셔도 되는 거야."

가연은 눈을 반짝이며 잔을 받아들었다.

"우와, 예뻐요."

한 모금 마시고 웃었다.

"맛있어요! 아까 그것보다 훨씬 나아요."

주열이 웃었다.

"당연하지. 너 맞춤으로 만든 거니까."

소연은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화가 다 풀린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더 화낼 수도 없었다.


구석에서 그 광경을 보던 단골 할아버지가 내 옆에 와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젊은이들, 참 보기 좋구만."

나는 잠깐 그쪽을 봤다. 주열이 가연한테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고, 소연은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듣고 있었다. 가연은 또 뭔가 질문하고 있었다.

"그렇죠."

나는 짧게 대답하고 잔을 닦기 시작했다.


마감 무렵, 소연이 주열한테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오빠 아니었으면 저 가연이한테 진짜 심하게 했을 것 같아요."

주열이 웃었다.

"가연이 표정 봤어요? 완전 쫄았잖아요."

소연도 웃었다.


가연은 방에서 다시 노트를 펼쳤다. 한 줄을 적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덮었다.

나는 못 본 척했다.


한켠은 오늘도 불을 껐다. 조금 시끄러웠고, 조금 따뜻했다. 별로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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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켠


프롤로그

2024년 9월 1일, 비 내리는 밤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차지 않았다. 소리도 크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내리는 종류의 비였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번지고, 골목 끝에서 끝까지 흐릿한 빛의 띠를 만들었다. 번화가에서 한 블록 벗어난 이 골목은 밤이 되면 언제나 조용했다.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 아니라, 어쩌다 발걸음이 닿는 곳이었다.

한켠은 오늘도 불을 켜고 있었다.


나는 올해 마흔둘이다. 박철.

키가 크지 않고, 체형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는 짧게 정돈하는 편이다. 오래 서 있는 사람 특유의 자세가 있다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손님들은 나를 처음 보면 대개 조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바를 연 지 10년이 됐다. 처음 문을 열던 날 밤이 아직 기억난다. 손님이 세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길을 잘못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그래도 음악을 틀고, 잔을 닦고, 마감을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어떤 밤은 길었고, 어떤 밤은 그냥 지나갔다. 버텼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여기 있는 건 사실이다.


주열은 바 한쪽에서 글라스를 닦고 있었다.

서른하나. 한때 복싱 선수였다. 지금은 여기서 일한다. 넓은 어깨와 두꺼운 손목, 팔에 남은 오래된 흉터 몇 개.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데, 그게 이상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등을 돌리면 공간을 살피는 버릇이 있고,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고, 나는 그 방식을 오래전에 믿기로 했다.


한켠은 술집이다. 그것 말고 다른 무언가이기도 하다.

정확히 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이곳을 나가는 사람들이 올 때보다 조금 가벼워 보인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게 술 때문인지, 공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어떤 것들은 이유를 알면 오히려 사라져버리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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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들어주소서. 영혼 깊숙이 울려 퍼지는 이 목소리를.

부디 바라봐주소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이 육신의 흔적을.

아름답던 시간 속에서, 하얗고 부드럽게 살아가려 했건만, 흠집투성이 바퀴를 끌고 이제 이 마차는 잠시 멈추려 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길을 뒤돌아보니, 그 위에 남겨진 나의 흔적들, 그리고 그 길을 이끌어준 손길들이 보입니다.

비로소,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서지고 삐걱이는 바퀴를 안으며, 흩어지려는 마음을 붙잡고 조용히 속삭여봅니다.

함께 걷던 이 마차를 비단길로 인도해주소서.


그 속삭임이 한 줄기 바람처럼 흩날려 하늘에 닿는 순간,

저는 마지막으로, 그러나 처음처럼 진심을 다해 감사를 전합니다.

지금까지 저를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Why couldn’t I be a little kinder?
Why couldn’t I endure just a bit longer?

Loving someone, hating someone,
hurting myself, shedding tears—

In the great wheel of time,
you remain as a single, lasting scar.

Unbearably painful, endlessly sorrowful,
yet you're the path I wish to cross countless times each day.
Every moment, gazing at the sky, I renew my resolve.

It would be so easy to give up and let myself fall,
but I can't—
because there's someone whose smile keeps me standing.

In the quiet hours before dawn,
I pour my sadness and pain into these gentle words.

Soon the sun will rise again,
and I’ll have to live another day
pretending everything is fine.

왜 조금 더 그러하지 못했을까
왜 조금 더 참아내지 못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를 미워하고
나를 아프게 하고 울게 만들었던

그 많은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오직 단 하나의 흠집으로 존재하는 그 사람아

견딜 수 없이 아프고, 참을 수 없이 슬프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건너고 싶은 길이고
매 순간 하늘을 보며 다시 다짐하는 나의 시간

포기하고 쓰러지는 게 훨씬 더 쉬운 선택이겠지만
그럴 수 없는 건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

해가 뜨기 전 새벽에 작은 글 하나 써 내려가며
나의 슬픔과 아픔을 조용히 흘려보낸다

곧 저 너머 해가 떠오르면
나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살아가야 할 테니

새벽에 일어나 노래 한곡을 듣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아무런 이유도 징조도 없이,

그리곤 SNS의 인스타에 글을 올렸다.
아무도 봐주지 않을 인스타에

그리고 작게나마 긴 여행을 떠난
그들이 왜 SNS에 잠시나마 글을 올렸는지

마음속으로 이해를 해버렸다.

새벽에 일어나 노래 한곡을 듣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아무런 이유도 징조도 없이,

그리곤 SNS의 인스타에 글을 올렸다.
아무도 봐주지 않을 인스타에

그리고 작게나마 긴 여행을 떠난
그들이 왜 SNS에 잠시나마 글을 올렸는지

마음속으로 이해를 해버렸다.

If someday I must set out on a long journey,
I know my heart would ache endlessly,
for not spending just a little more time
with the one who matters most.

If someday I must walk a road from which there is no return,
I would forever regret
not sharing one more joyful conversation,
not holding tighter to those who laughed beside me.

What more could I possibly desire in this life?

All I truly want
is a little more time with the people I love.
That longing alone is why I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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